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라타 쵸지 (문단 편집) == 현역 시절 == [youtube(Ugy1hmnQVto)] 전성기 때의 모습.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친선경기에서.[* 영상에 두번째로 등장해 2루땅볼로 물러나는 왼손타자가 캔자스시티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 [[조지 브렛]]. 구장은 [[고라쿠엔 구장]]이다.] [youtube(mbXMXm1pJOs)] [[올스타전]]에 출장한 말년의 모습.[* [[주니치 드래곤즈]]로 적을 옮긴 롯데 후배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대결한다.] [[히로시마]] 출신으로 후쿠야마 전파공업고를 졸업하고 1967년 드래프트 1위 지명으로 [[치바 롯데 마린즈|도쿄 오리온즈]]에 입단했다. 이후 팀명이 [[롯데 오리온즈]]로 바뀌는 동안에도 한 팀에서만 22년을 뛰고 은퇴한 오리온즈 시대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강철의 어깨를 가진 사나이. 선수시절 동안 팀 성적이 저조해서 상복은 많지 않았지만 1981년 다승왕을 차지하고 1975, 1976, 1989년도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으며 1975년에는 구원왕 홀더였다. 또한 1976, 1977, 1979년, 1981년 최다 탈삼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다만 이 당시엔 연맹 표창이 없었다. 1989년부터 제정.] 탈삼진 능력도 대단했다. 그리고 [[롯데 오리온즈]] 시대의 유일한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주역이기도 했다. 프로입문 초기 [[마작]]에 빠져 훈련을 소홀히 하기도 했지만 팀 선배인 [[고야마 마사아키]] 에게 '''"너 같이 능력있는 녀석이 재능을 썩히면 못쓴다"'''는 충언을 들은 후 정신차리고 죽을 각오로 훈련에만 몰두하여 정상급 투수로 거듭났다고 한다. [[선발투수]] & [[중간 계투]] & [[마무리투수]] 등 보직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마당쇠]]처럼 등판하며 세이브 1위에 오른 1975년에 11완투를 해냈을 정도로 철완을 자랑했다. [[가네다 마사이치]] 같은 전형적인 약팀의 슈퍼 에이스 였던 셈. 실제로 전반기에 그가 활약하던 시기는 [[가네다 마사이치]]가 롯데의 감독으로 재직하던 시기로, 가네다 자신 역시 현역 시절 강완의 투수였던 만큼 무라타에게 훈련 방식 등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무라타 쵸지의 전매특허라 할수 있는 마사카리 투구, 즉 도끼투구법[* 1971년 시즌을 앞두고 [[가네다 마사이치]]의 조언을 받고 고안했다고 한다.] 에서 나오는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과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포크볼]]이 일품이었는데 타이밍을 잡기 어렵게 만드는 투구폼에서 나오는 이 무기는 탈삼진능력의 원천이기도 했다.[* 물론 이 [[포크볼]]도 노력의 산물이다. 무라타의 포크볼은 입단 초엔 실전에서 도저히 못 써먹을 수준이었다. 그래서 당시 감독이었던 [[노닌 와타루]]가 연습을 금지시켰는데도 불구하고(같은 [[히로시마]] 출신이라서 아낀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속구의 위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포크볼 연습만큼은 금지시키고 있었다.) 노닌의 눈을 피해서 포크볼 연습을 계속하였다. 또한 당시 포크볼의 명수였던 [[무라야마 미노루]]에게 가르침을 부탁했을때 ‘24시간 동안 공을 쥐고 있어라’ 는 조언을 받아 이를 손가락에 공을 끼운 상태에서 줄로 동여매고 자는 것으로 실천해 포크볼 잡는 법을 몸에 익히려 했으나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잠을 잘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결국 한 번 시도만 해보고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포크볼 잡는 것을 깊게 하려한 나머지 집게 손가락과 중지 사이를 [[단검|나이프]]로 짼 적도 있다(.포크볼을 멋지게 연마한 후에도 오른손 중지와 집게 손가락 사이에 우유병이나 주문 제작한 강철로 만든 공 사이에 끼워넣기도 하고 문을 열 때 손잡이를 중지와 집게 손가락 사이에 끼워 여는 등 매일 같이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인에 의하면 무라타가 중지와 집게 손가락으로 맥주병을 잡았을 때 부인이 떼내려고 해도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22년간의 긴 선수생활 동안 은퇴하는 그날까지 1군 라인업에서 빠지지 않고 주축투수로 활약했다. 물론 타고난 강골인 무라타도 부상이 전혀 없었던건 아니어서, 1972년 시즌 부상으로 40이닝 투구에 그쳤고 1982년 에는 팔꿈치 인대파열로 인하여 수술 아니곤 선수생활 연장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선수생명을 걸고 [[미국]]에 가서 프랭크 조브 박사의 집도로 [[토미 존 서저리]]를 받으면서 3년 가까이 재활에 매진한 끝에 1985년 36세의 나이로 17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부활의 날개를 펼쳤다.[* 이 일화는 도덕 교과서에까지 실릴 정도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 토미 존 서저리는 거의 강속구 투수의 통과 의례처럼 생각된만큼 보편적인 수술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 당시 메이저리그에서도 팔꿈치 인대 이식수술은 선수생활을 걸고 최후에야 수술을 시도해 볼 정도로 선수들도 꺼리고, 시술 사례도 많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에서는 팔꿈치 부상으로 인대를 교체한다는 개념은 만화에나 등장할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30대 중반의 나이에 미국까지 가서 위험한 수술을 결심한 무라타에게 격려하고 응원하는 여론이 엄청나긴 했으나, 현실적으로 재기가 불가능하니 동정하는 차원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당시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팔꿈치 인대 이식을 통해 기적처럼 재기에 성공한 무라타에게 팬들이 받은 감동과 성원은 폭발적이었으며, 무라타의 복귀 등판을 지켜본 경기장의 관중들은 물론, TV와 뉴스를 통해 접한 사람들까지 감격에 겨워 눈물바다가 될 정도로 사회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이 시기 부상 회복 때문에 선발등판 횟수를 대폭 줄이는 대신에 한 번 등판하면 전력으로 투구하는 방법으로 주로 일요일에 선발등판을 했다. 그래서 '''일요일의 남자''' 또는 '''일요일의 쵸지''' 라는 별명이 생겼다. 은퇴 전 해인 1989년에 무려 22시합에 출장해(그것도 '''전부 선발로''') 16번의 완투를 기록하며 7승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다만 9패를 기록해서 승리보다 패배가 더 많았다.] 그 해 방어율 2.50으로 최우수방어율 타이틀까지 얻었다. 그리고 다음해이자 현역 마지막 해인 1990년 시즌에도 100이닝 이상을 던지는 괴력을 뽐냄과 동시에 시즌 10승을 기록하는 위엄을 보이며[* [[한신 타이거스]]의 [[와카바야시 타다시]] 이래 2번째로 40대인 투수가 시즌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한 것이었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41세의 나이로 유니폼을 벗었다.[* 은퇴경기에서 선발투수로 출장해 그날 경기에서 5이닝 무실점으로(참고로 이날 강우콜드로 5회에 경기가 종료되었다. 즉 강우콜드 빨이긴 하지만 완봉승.) 승리투수가 되어 10승을 거두었다.][* 여담으로, 무라타가 은퇴하면서 [[NPB]]에서 60년대에 데뷔한 프로야구 선수들은 모두 현역 명단에서 사라졌다.] 특이한 면모가 하나 더 있다면, 포수에게 사인을 보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 이는 [[크게 휘두르며]] 21권에서 언급되었다.] 덕분에 포수는 노 사인으로 들어오는 강속구와 폭포수 포크를 맨몸으로 막아내느라 죽도록 고생했고[* 1972~1977년까지 롯데의 주전포수를 맡았던 무라카미 키미야스가 특히 그의 노 사인 포크를 잘 막아내기로 유명했다. 이후 1978~1981년까지는 타카하시 히로시라는 포수가 주전포수를 맡았고, 마지막 전성기인 1985~1988년까지는 하카마다 히로토시라는 포수가 주전포수를 맡았다.(하카마다는 무라타보다 6살이나 어렸는데 무라타와 같이 은퇴했다. 무라타가 40대까지 선수생활을 한 게 크기도 하지만..)], 무라타는 일본 프로야구 최악의 폭투왕으로 이름을 남겼다. 주요 통산 기록은 다음과 같다. * 604 등판, 433 선발 등판(15위), * 215승(17위), 177패(14위) * 통산 평균자책점 3.24 * 3331.1 이닝(17위) * 184 완투(16위), 36 완봉승 * 2363 탈삼진(10위), 1144 볼넷(8위), 124 몸에 맞는 공(8위) * 148폭투(1위)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뛰어난 이닝 소화력과 탈삼진 능력을 갖췄지만 그만큼 많은 사사구를 내줬으며, 특히 통산 [[폭투]] 148개로 '''{{{#red,#ff0000 NPB 통산 폭투 1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 현역으로 지낼 동안 시즌 최다 [[폭투]]를 기록한 게 무려 12번이며 특히 1976년~1979년에 4년 연속으로 최다 폭투를 기록했다. 다만 폭투가 많은 건 그만큼 이닝 소화도 많았기 때문이며, 이닝당 폭투 허용은 22.5이닝당 1폭투 꼴로, 폭투 수 2위 [[이시이 가즈히사]](18.7이닝당 1폭투), 3위 [[아라카키 나기사]](10.7이닝당 1폭투), 4위 마에다 유키나가(18.8이닝당 1폭투) 등에 비하면 적다. 단순히 불명예스럽기만 한 기록은 아니며 오히려 꾸준히 등판해 뛰어난 이닝 소화력을 보여 줬다는 방증이 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